익산의 대표적인 백제유적은 금마면의 미륵사지 이다. 금마면은 백제 무왕이 태어난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연못의 용과 과부 사이에서 백제 무왕 즉, 서동(薯童 우리말로 마동)이 태어났는데, 마를 캐서 생활하였기에 마동이라 불리웠다. 선화공주를 사랑한 서동은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맛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라는 노래를 퍼트려 신라 진평왕의 세째딸 선화공주가 유배를 당하였고, 이때 백제로 데리고가 금을 발견하고 백제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화의 청으로 미륵사를 짓는다.
미륵사는 삼탑 삼금당으로 중앙에는 목탑을 동서에는 석탑의 모습을 한,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다. 중앙의 목탑과 서탑은 없어지고 허물어져 버렸고, 동탑만이 일제에 의해 콘크리트 보강으로 남아 있다. 콘크리트 보강이 1867년 프랑스에서 최초 시작 되었으니 당시만 해도 첨단 기법이었으나, 1998년 해체 복원 결정이후 185톤이나 되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수작업으로 떼어내고 해체 복원하는데는 13년의 시간과 140억원의 자금이 들어가는 엄청난 일이었다. 지금은 강도가 약해진 석재을 위해, 속에 구멍을 내고 티타늄 봉을 넣어 접합한 방식을 택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2009년 1월 서탑 해체시 주기둥 안에서 금제 사리호와 금제 사리 봉안기가 처음으로 발견 되었다. 또한 리벳으로 고정함과 동시에 상하짝을 끼워 닫은 사리호 안에는 사리병이 있었으니, 이를 발견 꺼내는데만 해도 2년이 걸렸다고 한다. 내사리병 안에는 진신사리가 보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된 금제 사리 봉안기에서 백제왕후가 좌평인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명확히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껏 믿어 왔던 미륵사 창건을 주도한 무왕의 왕후 선화공주는 허구의 인물이었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설1> 삼국유사에는 무강왕으로 나와 있는데 백제 31명의 왕중에는 무강왕은 없다. 강康과 녕寧은 편안하다는 같은 뜻으로 혼용 가능하기에 무강왕은 무녕왕이다. 무왕의 시기는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악화된 시기로 전쟁이 16차례나 있었기에 장인의 나라와 이럴 수는 없다. 금제사리봉안기에 기해년이 나오는데 무녕왕 19년 519년은 기해년이다. (기해년은 위덕왕26년 579년, 무왕40년 639년)
설2> 웅진시기 동성왕때 백제와 신라의 국혼 기록이 있는데 신라 이찬 비지의 딸과 동성왕의 결혼이다. 동성왕 이름이 모도 또는 모대 인데 맛동과 음이 비슷하다. 동성왕이 익산을 개발하고 탐라를 응징한 기록이 있다. 익산의 웅포라는 이름, 왕궁리의 파무기와 출토가 공주 공산성꺼와 같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에도 서동설화와 유사한 연성사 창건 설화가 있는데 일본에서 돌아온 백제 왕족 동성왕과 관련이 있고 이것이 전해 질려면 무왕때보다는 빠른 시기여야 하기에 동성왕으로 본다.
그러나 삼국유사와 서탑에서 나온 사리 봉안기가 부합되는점은 분명 있다. 첫째 기해년 건립이라는것. 둘째, 백제의 왕후가 건립을 주도 했다는 것. 셋째, 3금당 3탑 형식이라는 것과 용화사 밑 큰 못가라는 말처럼 습지위에 건립된 점 등이다.
중원 발굴시 기축년(629)이 새겨진 기와에 주목한다면 재위 41년간의 무왕의 첫째 왕후인 선화공주가 중탑을 세우고 10년뒤 두번째 계비 사택적덕의 딸이 동탑과 서탑을 세웠을 가능성이 가장 짙다. 그러나 중앙 목탑과 동탑의 사리 봉안기는 아직 흔적이 없다. 무왕의 아들 의자왕이 부왕 말년 632년에 세자가 되었다는 것과 641년 40명의 외족을 섬으로 추방하는등 왕후와 사이가 않좋았던 점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백제는 성왕때부터 왕계를 석가모니 왕계와 연결시키는 형태가 보인다. 이는 신라 선덕여왕에서 보이기도 한다. 왕실의 신성성 고양으로 성왕(전륜성왕) - 창왕 위덕왕(대통불, 위덕불) - 법왕(석가모니), 사택적덕가문(석가형제 지적)
사택적덕은 왕실과는 친척으로 무왕의 왕후가 된 딸이 미륵불을 중앙에 모신 미륵사에 동서로 석가와 다보를 모신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미륵사는 처음부터 3탑 3금당으로 배치 되었고, 백제왕후가 사택적덕의 딸이 발원한 그당대의 기록이 나온 만큼, 몇백년 뒤 후대 설화를 가미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한편 익산에는 180m거리를 사이에 두고 대왕릉과 소왕릉이 있다. 이 쌍릉 중 대왕릉은 여자의 치아와 신라계 토기가 나와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무왕의 능은 부여쪽에 있을것으로 보아 왔으나, 몇년전 정식 발굴 결과 노년층의 남자로 보이는, 낙상흔적이 있는 엉덩이뼈등이 발굴 되어 현재 무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왕릉은 지난 2019년 4월 발굴을 시작하였다. 과연 소왕릉은 누구의 묘일까?
----------------------------------------------------------------
1907년 건립된 익산 나바위 성당(김대건 신부의 첫 정착지)
거제 섬꽃 축제& 지심도 (0) | 2019.10.27 |
---|---|
대야산 자연휴양림 휴양관, 용추 폭포 (0) | 2019.08.15 |
서천 희리산 자연 휴양림(서천 국립 생태원 및 군산) (0) | 2019.07.28 |
비슬산 자연휴양림 캠핑 (0) | 2019.06.23 |
등억온천단지쪽에서 신불산, 간월재 산행 (0) | 2019.05.01 |
댓글 영역